뒷모습

시선은 어디에 닿아있는가. 본 전시는 시작 단계에서 회화 작가의 작업적 근원, 그 고유의 시선과 태도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디지털로 송출되는 동시대 이미지와의 영향관계나 현재 당면한 회화의 매체성 갱신을 위한 논의와는 다소 거리를 두며 그 기원을 다시금 되짚어 보려던 시도는 결국 회화의 오래된 명제인 자화상에 가닿게 되었다. 중세 시대 초기 자화상의 등장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묘사를 넘어 예술적 혁신과 사회적 메시지의 분출을 가능케 하는 경로로 기능해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층적인 자기 정체성의 탐구를 끌어낼 수 있는 회화적 수단일 수 있다는 것 역시 익숙한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본 전시는 자화상의 ‘재현’을 고민한다. 주지하다시피 회화는 그간 가장 오랜 재현의 전통을 가진 매체이다. 오늘날 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일면, 사회적 사건의 현장, 심지어 일상의 작은 사물까지도 개인의 삶을 보다 주체적인 차원에서 비춰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재현의 대상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그 선택만큼은 보기 드문 난제라는 생각도 든다. 거기에 더해 오늘의 예술이 미시로의 수렴과 거시로의 확장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시대와 개인의 교차점을 가늠하며 가치를 획득한다면,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전통적인 이미지 생산자, 화가가 재현하는 자화상은 꽤 궁금할 법한 논제이다.

참여하는 두 작가는 이에 화답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스트로크나 제스처, 도구의 자유로운 변용을 통해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때로는 끝끝내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자기의 모습을 인정하며 대상을 우회하고 개념을 앞세운다. 사실 ‘자화상’과 ‘재현’은 전시를 이끄는 두 꼭지인 동시에 같은 그림자 아래 서 있지만 서로 쉬이 닿을 수 없는 존재와 같다. 그렇기에 대상의 외피적 형상과 작가가 가닿고자 했던 그 너머의 상 사이에는 필연적 간극이 생긴다. 이를테면, 오일을 섞은 목탄으로 그린 한성우의 <석류나무>(2024)는 거리감에 따른 착시와도 같아 보이는 환영을 만든다. 이미지를 구축하지만 동시에 흐트러뜨리는 것, 그리는 것과 지우는 것의 경계면에서 획득한 이미지는 대상의 이미지를 얼핏 포착해 내는 듯하지만, 어느새 무너져 내리며 물질 고유의 성질에 담겨 가시화된 작가의 제스처, 즉 작가의 현존-신체성으로 환원된다. <자화상>(2024)은 또 어떠한가. 200호에 육박하며 관객의 신체 크기를 초과하는 스케일에 담긴 작가의 뒷모습은 애초에 형상이 한 눈에 담기길 거부하듯 자리한다. 그리고 잡힐 듯한 캔버스 위 형체는 이내 아스러지고 붓을 덧대고 문대듯 그리는 과정에서 이미지와 결부된 서사는 사라진다. 그가 만들어내는 불투명한 이미지는 지워짐이 아니라 존재’했음’에 대한 정서적 반영이며, 구체적 형상과 거리를 둔 ‘흐릿함’은 명시적인 언어로서의 명명에서 거리를 두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의 양식을 재현하려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면, 특정 대상을 구체적으로 화면 위에 옮겨 놓은 <시든 꽃> 연작(2024)과 마치 시퀀스를 만들듯 배열된 손의 모습(<무제> 연작 (2024), <무릎 위의 손> 연작 (2024))은 그가 줄곧 자신의 실존적 태도와 결부 지어 언급해 온 ‘부재의 정서’를 더욱 극적으로 가시화한다. 형태가 구체적인 만큼 앞선 작업과는 다르게 서사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해당 작업은 오히려 대상이 가진 상징성에 접속을 허가함과 동시에 미끄러짐을 유발한다. 예를 들면 손과 같은 대상은 화가의 정체성을 상징하지만, 그것을 자신에게서 분리하여 재현의 대상에 놓음으로 상징적 기호로 작동하지 않는 뉴트럴한 정물의 상태로 환원하거나, 꽃이라는 대상에 투영해온 보편적 관념에서 벗어난 상태를 포착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화면 안에 오롯이 위치한 손의 모양새는 화면 밖 표정이나 상황에서 탈각되어 비언어적 소통의 가능성을 열고, 고개를 떨군 꽃은 그 자체로 대상의 존재 양상을 밝히며 고정된 언어의 바깥에서 보다 깊은 감정을 전달해 낸다.

손현선은 한성우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온전한 재현의 불가능성에 질문하고 응답해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기 위해 물리적인 대상을 경유하거나, 유동적인 액체를 포착하기 위해 이를 담는 용기를 그리며, 시각 이외의 감각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이해하려고 했던 그에게 자화상 역시 불가능한 재현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불가능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현존을 입증하고자 한다. 지난 손현선의 작업이 같은 자리에서 나란히 대상을 바라보려는 것이었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서로 마주보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깊이와 밀도를 수반한 대화(dialogue)를 건넨다. 그리고 실제로 하루 한 명의 참여자와 등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워크숍을 여러 차례 선행한다. 타인과의 대화는 끊임없는 어긋남과 망설이기, 흩어짐과 기다리기를 발생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을 인식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의지 속에서 대화는 지속되고 나와 상대의 간격은 좁혀진다. 결국 이 불완전함의 인정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갱신하는 기회이며, 텅 빈 혼자의 시간을 타인과의 접속을 통해 활성화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무심히 흘러간 일상에서 조금 다른 시간대로 진입이 가능해지는 순간을 개설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경험을 서로 연동하는 몇 개의 작업으로 다시 또 분화시킨다. 이를테면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등을 맞댄 감각은 촉각적 차원으로 번안되며 관객의 접촉을 요구한다. (<백투백 : 우리-사이-열>(2024)) 그리고 잠시의 접촉으로 변화된 색을 마주함으로 관객은 그때 그들의 대화의 순간에 잠시나마 시각 이외의 감각적 방식으로 접속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는 다시 간헐적으로 공간을 채우는 내레이션, 그리고 벽에 삽입되어 플레이되는 작은 드로잉과 문구에 호응한다. 이는 지난 워크숍에서 나눈 대화의 부분을 발췌, 편집하여 무작위로 상연하는 것으로, 이미지-음성언어-문자언어의 관계 속에서 더욱 입체적으로 그때의 시공을 지금, 여기에 현시한다. 더 나아가 선명한 형상이 선사하는 시각적 인식 체계는 열화상 이미지(<백투백: 온기를 따라>(2024))로 재현된 작가의 실제 크기의 뒷모습과, 그 윤곽선을 따라 전사된 뒷모습, 한 몸에서 파생된 다음의 이미지-기호(<백투백: 온기의 가장자리>(2024))로 연속해서 분기, 연장한다. 이로써 손현선은 표피적 묘사나 해설이 아닌 다른 감각적 체계와의 연쇄 속에서 자신의 내밀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신체를 포섭해 낸다.

이미지의 끝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사실 이미지란 끊임없이 변하며, 수용자의 사고와 상상에 의해 유동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대상의 실제 형상과 우리가 읽어내는 상 사이의 간극에 대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시각적(인 질서 위에 조율된) 이미지를 경유해야 한다는 모순은 피할 수 없는 시각 예술의 본성이다. 본 전시는 자화상에 대한 논의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얘기는 돌고 돌아 명시적인 표정과 모습을 감춘 면, 뒷모습을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면이 아닌, 그 반대편을 향한 시선의 끝에서, 때론 형상을 감추거나 기대했던 서술과는 어긋나는 방식으로 오히려 대상에 입체적으로 다가서고자 하였다. 누군가는 시든 잎사귀와 말을 건네는 듯한 손짓과 같이 사물이나 신체의 부분을 언급함으로, 또 다른 이는 이미지 위로 드러나는 촉지적 감각에 주목하고 형상을 흩뜨리고 파헤치는 과정에서 창작자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미지의 독해를 돕고 또 방해하는 속삭임의 끝에서 인상과 해석은 미끄러지고 또 봉합되며, 원래의 경로에서 이탈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당신의,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여기, 작가(의 이미지는) 없지만, 무엇보다 생생하게 현존하고 있다.

크레디트

참여작가 : 손현선, 한성우
기획/ 글 : 김성우
공간조성 : 무진동사
사진 : CJY ART STUDIO (조준용)
사운드 : 윤재민

도움 및 협력 : d/p, 김성우, 배은아, 임수영, 이윤정, 이제, 이한범, 황혜란, 홍이현숙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4 시각예술창작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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