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에서
전시 «사랑의 기술»은 사적인 아카이브를 경유해 공동의 서사를 상상한다. 본 전시에서 ‘수집’은 단순히 대상을 축적하거나 보존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흔적을 되짚고, 상대의 시간과 기억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는 실천이며, 미시적 경험에서 공통된 사회적 감각으로 확장하는 과정이다. 누군가의 기록과 경험은 또 다른 누군가와 맞닿아 있으며, 개인의 서사는 공동의 문맥을 형성한다. 이러한 축적은 완결된 지적 체계로서의 아카이브로 귀결되기보다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관계의 장을 형성한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우연히 발생하는 감정적 사건이 아니다. 그는 사랑을 일종의 ’기술(art)’이라 명명하며, 훈련과 연습, 그리고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길러지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사랑은 특정 대상을 향한 감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타자를 대하는 하나의 태도이며 존재 방식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관심이고, 지배가 아니라 돌봄이며,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프롬은 사랑이 관심, 책임, 존중, 그리고 앎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통해 비로소 성립한다고 말한다. 이는 상대를 자신의 욕망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고유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응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 전시는 시장가치에 의해 상품으로 대체된 교환적 의미에서의 사랑, 혹은 소유로서의 사랑, 더 나아가 개인의 욕망 충족에 머무르는 사랑이 아닌, 타자의 존재 양식으로 수행되는 사랑의 행위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안초롱은 타인이 촬영한 사진 기록을 들춘다. 작가에게 사진 이미지는 데이터로부터 시작해 언제나 새로운 문맥으로 해석, 확장되길 요구하는 잠재태이다. 즉, 사진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 대한 사적 기념인 동시에 기록된 이미지 스스로 어떤 욕망을 내포하듯 외부의 맥락이나 타인과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시에서 작가는 누군가에게 전달받거나 우연히 획득한 이미지에 새로운 몸체를 부여하고, 사진에 의해 매개되는 관계를 살핀다. 이를테면, 상대방에게 느끼는 애착과 친밀감이 자신과는 무관한 엽서 속 풍경 이미지에 의해 매개된다는 그 어색함은 구멍 난 엽서, 그리고 펜던트의 형태로 축소 분리된다. (<밀크레이크 : 이슬로부터 2011 (Round Ver.)> & (<밀크레이크 : 이슬로부터 2011 (Frame Ver.)>) 여기서 구멍은 비어 있으므로 작동하는 관계적 구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는 결손이나 결여의 자리이기보다는, 결여로부터 구조화되는 의미를 강조한다. 구멍은 엽서 속 편집된 이미지 - 장소의 일부를 취사선택하고, 특정한 시선에 맞춰 압축된 이데올로기적 표면으로서의 풍경 - 의 질서를 초월하여 풍경 너머의 내밀한 관계를 환기하는 포털로 기능하며(<밀크레이크 : 이슬로부터 2011 (Frame Ver.)>), 엽서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미지는 손안에 담기는 사물로서의 신체를 얻게 됨으로 흩어지는 기억을 붙든 채 현재로서 생동한다(<밀크레이크 : 이슬로부터 2011 (Round Ver.)>). 또한, 어머니가 촬영한 일상의 풍경은 작가가 촬영한 필름 사진과 하나의 프레임안에서 서로 물리적으로 부착, 중첩된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프린터에서는 연고를 알 수 없는 필름 속 누군가의 내밀한 기록이 규칙적으로 출력되고 배포된다. (<빌린 장면>) 이렇듯 작가는 이미지를 수신, 재맥락화하여 다시 송신하는 식으로 사진 이미지를 중개하는 매개자를 자처한다. 그의 사진은 타인이 찍거나, 특정 체계 안에서 통용되는 사진, 더 나아가 우연히 발견한 사진까지를 포괄하며 일상을 부유하는 말 없는 이미지를 사건화하는 방식으로 타인과의 접속을 시도한다.
한편, 이강승의 작업에서 아카이브는 과거를 보존하고 분류하는 완결된 지적 체계라기보다, 역사에서 누락되거나 충분히 애도 되지 못한 존재들을 현재로 다시 불러들이는 관계적 실천에 가깝다. 작가는 공적이거나 사적인 기록, 사진과 언어, 사물과 식물, 유기물 등을 수집하고 재구성하면서 주류 역사에서 배제된 퀴어한 삶의 흔적들을 서로 연결한다. 여기서 수집은 사라진 존재를 대신해 말하거나 이들을 하나로 봉합하여 정합적인 역사로 복원하려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하게 남은 흔적의 간극을 유지한 채,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 속한 존재들이 잠정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작가의 아카이브는 보존보다 돌봄의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자료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기억을 현재의 시선 아래 다시 배치하는 일이기 때문이며, 완전한 서사를 복원하려는 것이기보다는, 기록의 공백과 익명성, 타자의 불투명성을 보존함으로 윤리성을 획득하는 탓이다. 예컨대 〈A Diary of Flower〉연작은 Ed Aulerich-Sugai가 1994년에 에이즈로 사망하기 전까지 파트너와 함께 가꾸었던 작은 정원에서 수집한 식물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다. 이 기록은 명시적인 개인의 서사나 사건을 전면에 노출하는 대신, 삼베 위에 수놓인 꽃들의 이미지로 이를 대신한다. 이때 꽃은 기록의 주변부에 놓인 장식이 아니라, 언어만으로는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한 사람의 감정과 욕망을 담지한 간접적인 타인의 초상이 된다. 더 나아가 이강승은 〈Untitled (The Future Perfect)〉에서 공동의 미래를 떠올린다. 여기서 작품을 구성하는 마른 꽃과 잎, 운석, 수집한 흙을 섞어 만든 도기, 화석화된 구리 등 서로 다른 시간성과 장소성을 지닌 물질들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환기하는 재료이다. 삼베에 금사로 쓰인 문장은 ‘미래가 올 때’로 시작하는 미래완료형의 문장을 주변의 동료들에게 요청하여 수집한 것으로 집단적 퀴어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각자의 좌표를 지닌 채 자리한 사물들 -화석과 식물 등-은 지질학적 시간을 간직한 채 인간의 생애를 상회하거나 밑돌며 복수적 시간의 층위를 하나의 장으로 구성해 낸다. 이로써 미래는 한 개인의 전망이 아닌, 다수의 목소리가 함께 써 내려간 공동의 서사로 제안된다. 작가에게 기억은 고정된 정보가 아니라 몸과 물질을 통해 계속 변형되고 전승되는 것이며, 그의 작업은 과거를 보관하는 저장소가 아닌, 세대와 지역을 가로질러 기억을 다시 관계 맺게 하는 매개체이다. 이렇게 이강승의 수집과 기록은 사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역사가 충돌하고 교차하는 ‘살아있는 아카이브’로 거듭난다.
마지막으로, 노송희는 그간 기존의 도면이나 팩스, 드로잉 등 파편적인 기록을 영상 매체로 변환하며 새로운 시공간적 리듬과 서사를 부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한 흔적을 뒤따르고 그 미시적인 단서들로부터 모종의 지도를 작화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물류 차량의 뒷문에 남겨진 택배 노동자의 손자국이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정해진 목적지와 경로를 수행하는 화물차가 물류 시스템의 효율과 속도를 가시화한다면, 차체 표면에 남은 손자국은 그 체계를 실제로 움직이는 몸의 존재를 예기치 않게 드러낸다. 손자국은 노동의 결과물도, 의도적으로 작성된 기록도 아니다. 그것은 문을 밀고 닫으며, 짐을 싣고 내리는 반복적인 몸짓 속에서 무심코 누적된 접촉의 자국이다. 어쩌면 그 비의도성과 불완전성으로 인해 손자국은 공식적인 노동의 기록이 포착하지 못하는 개인의 시간과 움직임을 증언한다. 그렇게 전시장의 창문, 벽면의 드로잉과 영상을 가로지르며 유령과 같이 출몰하는 손들은 겹치고 지워지며, 하나의 집단적이면서도 식별 불가능한 추상적 초상을 형성한다. 규격화된 물류의 표면 위에 갑작스럽게 출현한 신체의 흔적은 비인칭적 시스템 속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 인간성의 징후이자, 말없이 수행되어 온 노동이 남긴 침묵의 발화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자국들이 출현한 장소와 이동의 경로를 추적한다. 그러나 그가 구축하는 지도는 도시를 일정한 거리에서 내려다보며 도로와 구역을 도표화하는 통상적인 지도와는 다르다. 그것은 거시적 차원에서 시스템화된 도시의 전체를 재현하기보다, 하나의 손자국에서 출발해 그것이 암시하는 움직임과 관계를 따라가는 미시적 차원의 지도 제작cartography에 가깝다. 짐을 실어 나르는 차량은 도시의 곳곳을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작가가 기록하는 것은 차량의 정확한 출발지와 도착지가 아니라 그 이동을 가능하게 한 몸의 접촉과 마찰, 반복과 피로이다. 이때 지도는 이미 존재하는 공간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던 노동의 궤적을 따라가며 도시를 새롭게 감각하도록 만드는 수행적 장치가 된다. 그렇게 보자면 노송희의 수집은 완전한 정보를 지닌 총체적 아카이브를 완성하려는 시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그것은 공식적인 기록의 체계에서 결손된 단서를 발견하고, 그 파편으로부터 기록되지 않은 삶의 영역을 상상하는 일이다. 먼 거리에서 도시를 조망할 때 보이지 않던 신체와 노동의 흔적은 작가의 추적을 통해 도시의 표면 아래 흐르는 혈관과 같은 새로운 경로를 형성한다. 따라서 그가 그려낸 지도는 미시적인 삶의 제스처를 따라가며 거시적 체계의 이면을 역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음화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이미지를 수신하고 다시 유통함으로써 관계의 경로를 바꾸는 안초롱, 결락된 기억의 파편을 재배치하며 시간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연대를 상상하는 이강승, 공식 기록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유령과 같이 삶의 언저리를 부유하는 노동자의 신체를 추적하고 맵핑하는 노송희, 세 작가의 서로 다른 방법론은 수집과 기록이 소유의 행위가 아니라 타자와 연대하는 복수의 기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랑은 단지 특정한 ‘대상’과 맺는 관계에 한정되지 않으며, 세계와 타자를 대하는 방식 전반을 결정하는 하나의 ‘태도’라 할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기억은 기록을 통해 개인에게 귀속될 수 있지만, 기록이란 형식은 그것이 생성된 사회적 조건과 관계를 암시하며 다른 시간과 존재를 향해 이동할 가능성을 내재한다. 이때 사랑은 타인을 자신의 서사 안에 완전히 이해하거나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개별성을 유지한 채 접속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실천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자, 공동체를 지속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윤리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크레디트
참여작가 : 노송희, 안초롱, 이강승
기획/ 글 : 김성우
공간 조성 : 무진동사
영상 장비 : 콤프원
사진 : CJY ART STUDIO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