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저장이 디지털 장치로 전환되고, 더 나아가 디지털 스크린과 플랫폼으로 송출, 순환되는 오늘날의 대다수 이미지가 그러하듯 안초롱의 사진 역시 데이터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성질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그는 그저 습관처럼 끊임없이 주변을 찍은 사진을 하드 디스크에 옮기고, 느슨한 목록으로 분류, 데이터로 저장해놓을 뿐이다.1)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무한 복제와 재생산의 메커니즘에 적극 의탁한 그의 데이터가 일종의 잠재태로서 언제나 새로운 문맥으로 해석, 확장되길 원한다는 것이다. 즉, 특정 시간과 장소에 대한 자기만의 기념으로 이미지를 다루기보다 기록된 이미지 스스로가 어떤 ‘욕망’을 내포하듯 외부의 맥락이나 타인과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하길 기대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W.J.T 미첼이 제기한 이미지의 행위성(agency) 차원에서 그의 작업을 살필 수 있게 만든다.2) 즉, 안초롱이 생산한 이미지는 고정된 의미의 저장소가 아니라, 크게는 역사, 사회, 문화에서 시작하여, 작게는 개인의 경험이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고 살아있는 역동적인 현상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그가 존재하고 기록했던 순간에 관객이 수동적으로 접속하길 요구하기보다는, 개별의 기억이나 경험, 감정을 자극하며 공동의 심리적인 반응을 기대한다.3)
안초롱의 사진은 조형적 구체성 속에서 더욱 적극적인 반응의 언어로 전환된다. 디지털 이미지가 지닌 납작하고 매끄러운 표면, 소비문화 속 표피와 껍질의 언어로 다루어지는 이미지의 반대편에서 그는 물화된 이미지의 전략을 취한다. 애초에 사진 예술은 인쇄를 전제하는 매체이기에 이러한 물질의 영역이 새삼스럽지는 않겠지만, 작가는 이미지의 지지체를 다양한 차원과 맥락에서 참조, 전유한다. 때로는 친구가 보내준 엽서 이미지와 오래전 촬영한 친구의 일상 사진을 함께 전시함으로 선형적인 시간으로부터 이탈한 비선형적 과거 위에 축조된 현재를 반추하고 (<밤이 낮으로 변할 때>(2019, 아트선재센터, 서울)), 휴대폰 케이스를 사진의 액자로 전유하여 타인의 일상 속에 그의 사진이 기거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AN CHORONG PLUS》 (2023, Dapalm, 서울)) 심지어 휴대전화 액세서리와 한 몸이 된 사진은 일상에서 사진이 존재하는 양상에서 더 나아가 ‘셀피와 함께 촬영된 사진 속 케이스에 삽입된 사진’으로 이미지가 연쇄하게끔 하여 보편적 문화 행위가 되어버린 ‘촬영’에서 비롯된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도 재고하게끔 한다. 마치 이미지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image)라는 명제 아래 과거 소수에 의해 독점적으로 생산, 통제되던 이미지에서 이제는 누구든 촬영과 편집, 확산과 유통의 주체가 될 수 있게 된 동시대의 현실을 환기하며, 이미지를 둘러싼 사회, 문화, 정치적 위계의 재편과 다양한 목소리와 경험이 공존하는 질서까지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이렇듯 지지체에 기대어 이미지를 물질의 영역에 진입시키는 안초롱의 사진가적 태도는 《Flesh》(2024,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서울)에서도 이어진다. 작가는 4인용 테이블을 눕혀 놓은 듯한 구조 위에 놓이고 끼워진 사진들을 통해 일견 일상생활 속 식탁의 상판과 유리 사이에 끼워진 사진 이미지의 존재 방식을 환기한다. 이는 사진이 지닌 속성, 즉 특정한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추억하고 기억하려는 태도에 견주어 보다 사적인 차원으로 관객의 시선을 이끈다. 사사로운 습관과 행태에서 취한 사진의 존재 양식은 투명한 유리컵 속에 말려서 담긴 사진(<뉴 홈 2024>)으로 이어지며, 이미지 자체의 해석적 의미나 미적 성취보다는 그것이 존재하는 물질적 양상을 경유해 우리의 내밀한 삶의 양식을 환기하며, 사진 이미지와 일상의 관계를 되묻는 듯하다.
인쇄의 프로세스를 거쳐 데이터-이미지를 (여러 종류의) 단단한 프레임 위에 안착시키고, 매체적 특질에 기대어 공동의 일상적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사진 이미지에 ‘살(flesh)’을 더하는 시도였다면, 개별 이미지, 그리고 나열된 이미지와의 관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간적 감각, 그 서사적 가능성이 또 다른 하나의 ‘살’이라 할 수 있겠다. 전시에서 마주하는 사진은 작가의 가족이거나 매우 가까운 지인, 그리고 사물과 풍경 같은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안초롱이 취하는 이미지의 구성 원리이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기를 들기보다는 우연히 마주친, 하지만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장면들’을 탐닉한다. 개별 피사체에 과도한 의미나 상징을 부여하길 지양하고, 마치 그것이 놓인 상황, 사물이 일상 공간에서 존재하는 양상 등에 눈을 돌림으로 마치 사물의 질서 내에서 특정 개인의 존재 양식을 더듬게 만든다. 그의 사진 속에서 인물은 과감하게 크롭되고, 그가 포착한 장면에서 배경은 중심부에 들어선 사물과 거의 동등하게 시선을 이끈다. 대부분의 피사체는 작가와의 특수한 관계를 증명하기 위한 기호라기 보다는 특유의 추상적 상황을 관통하는 정서만을 공유한다. 분명히 일상의 ‘기록’이긴 하지만, 다큐멘터리로서의 서술적인 메시지나 서사도 모호하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작가 주변의 삶인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피사체에 감정을 이입해 동일시하지 않고, 특유의 거리감을 유지한 채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는 사진에서 개별의 대상은 구체성을 잃는다. 그렇게 노쇠한 여인의 주름과 내비치는 핏줄은 극대화된 거죽의 물성으로 치환되고 (<살구와 여자 2020>, <면회 시간 2024>, <해피 버스데이 2024> 등), 노인의 발과 다리를 주무르는 손의 이미지(<마사지 2020>)는 시간을 달리 담지한 두 신체의 접촉에서 비롯한 이질적 물질 감각으로 이어진다. 한편, 누군가의 공간을 구성하는 물건들에서 부분 발췌된 이미지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개인의 신념이나 소망, 염원, 혹은 강박이나 취향은 원래의 기호와 상징체계에서 빗겨나 사물 그 자체의 이미지로 환원된다. (<오래된 집 #1 2017, #2 2021, #3 2024>, <침대 위 젖은 돈 2021> 등) 또한, 테이블 위에서 음식을 자르고 나누는 자세, 사물의 배경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과 같이 신체의 부분만이 남겨진 장면들은 화면 밖 모종의 서사를 과감히 끌어들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며, 타인이 대입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서사를 위해 복무하는 제스처로 전환된다. 유형으로 구분 짓기에는 다소 느슨한 관계와 구성 원리에 힘입은 작가의 사진은 이러한 방식으로 개인의 추억이나 사적 감상으로부터 이탈하고, 오히려 심리적, 정서적, 서사적 반응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관객과의 거리를 급격히 좁혀 나간다. 작품의 제목 뒤에 붙은 숫자가 암시하는 촬영 시기는 이 이미지들이 기록 데이터에서 출발했음을 증거하며, 재맥락과 재배열 속에서 삶의 리듬을 획득한다. 그렇게 안초롱의 사진, 그 위계 없는 장면에서 상징은 해체되고, 이미지는 세속화되어 더없이 삶에 가까운 정서로 생동하기 시작한다.
전시장의 규범이라고 일컫는 화이트큐브는 종교의 신성함과 법정의 엄중한 객관성을 필두로 그 구조를 축조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손안의 사진기로 손쉽게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오늘날 누구든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전시’하는 상황에서 사진가의 손에 쥐어졌던 신성함을 부여할 권리는 서서히 박탈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제의적 가치를 잃어버린 사진은 무게를 상실한 가벼운 이미지로 어디든 도처에 깔리게 되었다. 하지만, 안초롱은 동시대 이미지의 세속성을 적극적으로 수용, 전유한다. 그리고 그는 사진가로서 대상에 부여하려는 거대한 의미 이전에 사진과 대상이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피사체가 스스로 말하는 순간에 귀 기울인다. 예컨대 그는 화가가 빈 캔버스의 화면을 마주 보며 상상하는 무한한 깊이의 공간이나 장면이 있는 것과 같이, 사진가는 세계를 프레임만큼의 크기로 ‘용인’, 혹은 ‘인용’하는 장면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피사체가 스스로 발화하는 순간을 위해 안초롱은 이미지의 얇은 표피 위에 살을 더하거나, 피부 아래 자리 잡은 두터운 살집을 끄집어낸다. 이로써 데이터 더미에서 길어 올려진 그의 이미지는 새로운 맥락적 해석을 위한 가능태에서 일상과 삶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거기에는 사랑이나 증오, 후회나 추억과 같은 내밀한 정서가 충동하며, 순간에 머무는 데이터 이미지에 더해진 살은 이 찰나의 세속적인 이미지에 영원과도 같은 정동적 순간을 선사한다.
-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그가 촬영한 많은 사진은 보통 ‘지명’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 심지어 일부는 ‘null’이라는 폴더명에 담겨있다. 각 카테고리 안의 사진을 살펴보면 해당 장소의 특징을 드러내는 식의 기념적 사진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시간도 장소도 모호한, 그저 작가의 편의에 의해 분류된 말 없는 이미지만이 떠다니는 듯하다.
-
W. J. T 미첼은 이미지를 단순한 기호나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자로 재해석한다. 이는 이미지가 스스로 어떤 ‘욕망’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욕망이 관람자나 사회적 맥락과 상호작용을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
이를테면, 안초롱은 《Transposition》(2021, 아트선재센터, 서울)에서 빠르게 소비되고 폐기되는 광고 이미지를 일부 활용함으로 동시대 대중문화 이미지가 우리의 인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유도하고, 《Fem》 (2022, d/p, 서울)에서는 사진 속 여성들이 보는 것과 여성 사진가로서 안초롱이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일상 속 ‘여성의 시선’을 배경으로 이미지를 취사 선별함으로 ‘여성성’에 대해 얘기하였다.

크레디트
참여작가 : 안초롱
기획/ 글 : 김성우
공간조성 : 무진동사
사진 : CJY ART STUDIO (조준용)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5 시각예술창작산실, MnJ 문화복지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