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에서 빛난 후

양유연의 작업은 일상을 잠식하는 불안함에 기인한다. 그것은 사회 속 개인과 집단의 믿음이 붕괴하는 순간, 또는 익명의 개인이 사회의 부조리함에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순간 가시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고유의 시선과 시각,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표현 방식을 통해 불안의 정서를 화면 위에 담아낸다. 이를테면, 그는 빛의 강도를 섬세하게 조절함으로 어두움의 자리를 확보하거나, 사건의 현장 가운데, 그 주역이 아닌 주변부, 익명의 대상을 화면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 특유의 뉘앙스를 증폭시킨다. 또한 일상에서 포착한 이미지를 크롭하고 재구성하여 프레임 안에 안착시킴으로 기존 서사로부터 이탈하여 거기에 함몰되었던 서사의 가능성을 부추긴다. 여기에 더해 얇지만, 그 깊이와 밀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표면의 질감은 마치 막(membrane)을 씌운 듯 선명한 현상을 교란하며 그 이면으로 시선을 향하게 한다. 이렇게 양유연이 포착한 삶의 순간에는 사회 속 불안정한(vulnerable) 개인의 실존적 고민과 고독, 그리고 상실감이 가득하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지닌 얼굴들
인물의 얼굴을 재현한다는 것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이에게 꽤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우리가 얼굴이라 일컫는 것의 구성들, 즉 표정과 시선, 피부의 색과 주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언어와 같이 많은 것을 꽤 분명히 서술해 주니 말이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재현에 다가설수록 말없이도 대상의 정체는 분명해지고, 이미지에 잠재하는 맥락보단 표면의 현상에 시선을 머무르게 한다. 반면, 양유연이 그려낸 얼굴들은 그 기술적 숙련도에 반비례하여 오히려 정의할 수 없음에 다가선다. 상황을 유추할 수 없도록 주변이 잘려 나간 프레임 속 얼굴은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핏기 없는 피부와 동요하거나 흔들리는 초점 잃은 눈동자는 현실에서의 의지를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동시에 고양된 정신의 끝에서 마주한 각성의 상태로도 보인다. 마치 불안과 고요, 공허와 충만, 희열과 절망, 광기에서 환희를 동시에 내재하는 표정은 하나의 장면이 아닌 다성적 서사와 정서를 충동한다. 한편 이렇게 요동치는 동공은 프레임밖의 시선에 의해 자신을 의심해야 불안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자각하고 프레임 밖 대상에 다가서기 위해 발광하는 눈빛이다. 어쩌면, 양유연이 그린 얼굴은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 혹은 우리의 분열증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흔들리는 얼굴에서 나와 너, 우리와 너희, 그리고 나의 또 다른 면들이 내비친다. 사실 얼굴-이미지는 말이 없다. 그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욕망이 투영되어 흔들리고 있을 뿐.

명과 암
빛을 등지고 선 대상은 형태의 외곽선을 따라 매우 짙은 흔적을 남기지만 끝내 그 형상의 내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림자는 속 깊숙이 시선을 이끌지만 한없는 침전만 허락할 뿐 결코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다. 시선은 깊은 어둠 속으로 이끌렸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대상의 바깥으로 토해질 뿐이다. 반면, 환하게 비추는 빛은 어디 하나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지만, 균질한 표면 위로 음영의 깊이를 삭제하고, 끊임없는 자기 투사의 모순에 봉착한다. 양유연은 화면의 중심에 사물을 위치시키지만, 그 사물의 정체를 명료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단서는 어둠과 함께 드러난 형상일 뿐이다. 예를 들면 역광을 받은 사물은 그림자가 되어 검은 실루엣으로 존재하며 그 너머와 틈새로 시선을 분산시키거나(, 2023), 반대로 명확한 식별이 불가능한 대상이 그림자로 존재감을 취득하는 식(<누운 빛>, 2023)이다. 중요한 것은 재현된 사물의 선명함이 아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이며, 빛으로 밝혀진, 하지만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 상황과의 극명한 대비이다. 어둠으로 침묵하는 대상은 주변의 빛으로부터 의미를 획득한다. 거기에는 어떤 떨림과 흔들림의 뉘앙스만이 존재한다. 시선에 명료하게 잡히지 않는 사물은 희미하게 대상으로부터 탈구하지만, 동시에 깊은 어둠으로 각인된다.

잔존하는 빛의 틈새
《그 사이에서 빛난 후》(2023, 프라이머리 프랙티스)는 이미지간 분할과 연결의 틈새로 이루어져 있다. 세로나 가로 한 방향으로 긴 사각 프레임은 개별로, 또는 함께 하나의 장면을 만들지만, 의미는 거기에서 종결되지 않는다. 여기에 간격이 만들어 내는 틈새는 다음의 의미를 열어젖힌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앞뒤 시퀀스의 이질적 접합이 초래하는 긴장처럼, 혹은 매끄러운 이음새 사이 의도된 갑작스러운 단절이 상상적 차원의 링크를 설계하도록 우리의 사고를 이끌듯 말이다. 그러므로 절단된 프레임은 새로운 의미의 영토로 작동한다. 그곳은 양유연이 빛과 어둠의 대립 가운데 존재의 방식을 발설하듯, 죽음과 생동, 무의미와 의미 사이에서 새롭게 미광을 발산하는 영토라 할 수 있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말했듯이 미광은 강한 빛과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긴장을 생성하고, 변화의 역동성을 획득한다. 이 연약한 빛은 모든 깊이를 소거한채 표면 위의 세계로만 이끄는 서치라이트와 대립하며 표면 아래 어둠 속 생의 순간을 인식하게 한다. 그렇기에 매우 미약하며 질서 없이 산란하지만, 끊임없이 어둠 속에서 출몰하는 삶의 빛이라 할 수 있다. 화면 속 얼굴들의 시선은 분할된 경계에 가로막힘으로 그 틈새의 미광을 향한다. 프레임 바깥을 향하고, 틈새 속에 잔존하는 흐릿한 빛의 자리를 좇는 눈들은 어둠 속에서 단속적으로 출현하는 미약한 빛의 자리를 살핀다. 산발적으로, 하지만 끊임없이 출몰하고, 소멸하고, 다시 또 출현하는 이 틈새의 미광은 잔존하고 저항하는 삶의 정서이다.

익숙함과 낯섦의 표정을 동시에 내재하는 얼굴들과 일상의 순간, 그리고 거기에 있던 사물들이 선사하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은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때론 서늘하고 섬뜩하게, 한편으로는 광기 어린 환희의 끝에서 마주하는 고요함처럼 이질적 정서를 오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는 작가가 얘기하는 “불안의 시대”에 하염없이 아스러지는, 하지만 다시 삶을 지속하려는 감각이 감지된다. 어느 순간 내가 바라보던 대상은 시선의 끝에서 점점 더 흔들리며 하나의 소실점으로부터 멀어지지만, 작가가 그려낸 화면 속 응시와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내가 선 여기, 이 자리에 대한 감각은 조금 더 선명해진다.

크레디트

참여작가 : 양유연
기획/ 글 : 김성우
디자인 : REMOTE (김승환)
공간조성 : 무진동사
사진 : CJY ART STUDIO (조준용)

Related Collaborato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