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배의 그간의 작업은 견고한 조형적 형상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형식적 외피의 차원에 종속되지 않는 의미를 향해왔다. 그것은 공간을 점유하는 형식 안에서 개별 오브제로서, 동시에 공간의 물리적 환경으로서 다양한 관계를 발생시킨다. 관객의 시선을 표피적 이미지 너머로 연장하거나, 형상의 내부에 은밀히 설계해 놓은 논리 위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그의 조각은 시각적으로 구현된 고정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형식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품은 그것을 둘러싼 환경의 조건까지 포섭하며 의미 확장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타인에게 관측된 결과는 역설적으로 아직 그 무엇도 되지 않은 어떤 상태에 가깝다. 즉, 무엇이라고 규정된 상태로서의 조각이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과정의 존재로서 시선의 관계 안에 위치하는 것과 같다. 작가는 조각의 정지된 이미지와 그 이미지 너머로 향하려는 사유가 지닌 운동성의 역학 안에서 기존의 인식 체계가 지닌 관습적 양태, 혹은 그 한계에 반문한다. 김인배의 작업 앞에서 고정된 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의 연쇄로, 지속적인 형식으로 계속해서 생성되고 허물어지길 반복할 뿐이다.
본 전시 《없는 것을 보고》는 ‘보이지 않는 것’을 조각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가능해지는 실천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 없는 것을 보고자 하는 행위는 이제는 당연해진 미술의 전제 조건, 즉 재현 너머를 상상하는 일과도 같다. 잠시 과거의 미술사를 복기해 보자면, 없는 것을 보려는 시도는 때로는 무의식적 측면을 탐구하기 위해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동원하는 식으로, 혹은 형태나 이미지가 아닌 색채, 질감, 선 등을 통해 개인의 내적 경험과 감정,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후로는 물리적인 구현을 최소화하고 개념이나 아이디어를 중심에 두거나, 최소화된 요소로 예술의 표현을 제한함으로 불필요한 장식성을 제거하여 본질에 다가서려는 시도로 이어져 왔다. 시대와 흐름을 달리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철학적, 심리적, 사회적 탐구의 도구로서 예술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며, 예술이 현실 너머의 영역을 탐구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임을 입증해 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기존의 현실 재현에 국한되지 않는 것, 그 너머의 영역을 탐구하는 일은 다분히도 물질적인 재현을 동원하면서도 이를 경로로 실재에 다가서려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보이지 않음은 오히려 가능성의 세계를 지시하고 있으며, 해석과 재해석의 시퀀스는 현실 세계의 단순한 모사에서 벗어나 상상, 추상, 가상, 개념으로 생동하는 차원을 가설하게 한다.
우선 본 전시에서 김인배는 장소와 공간의 개념 을 배경으로 기존의 관성적 인식의 양태를 비틀고, 새로운 인지적 감각을 자극하여 모종의 차원을 가설해낸다. 이를 위해 작가는 전시장 입구 바로 앞의 공간을 모사하기로 한다. 공간을 인식한다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물리적 환경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열린 대기는 물리적 구조를 통해 공간의 단위로 구획되고, 기능은 곧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구성하니 말이다. 작가는 입구 앞 허공, 그 여백의 공간을 시각 안에 담는 과정에서 천장과 바닥 두 곳의 특징을 경유하게 된다. 그리고 수직으로 마주 보는 두면 -천장과 바닥-을 수평으로 마주하는 벽면 위에 모사한다. 한쪽의 벽에는 실제 천장에 붙어있는 전기 설비의 일부를 그대로 재현하고(<공간 모사_저 멀리>(2024)), 그 반대편에는 흑연을 통해 탁본을 뜨듯 기록한 바닥 면의 균열과 자국을 이식한다. (<공간 모사_보고 만지고>(2024)) 특히 바닥을 재현한 작업 중 하나는 얇은 종이를 대고 연필을 문대어 표면의 흔적을 기록한 지면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름종이로 바닥 면의 틈새를 따라 그린 기록을 다시 먹지로 벽 위에 새긴다는 점에서 두 재현의 형식은 마치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혹은 모각과 캐스팅처럼 대구를 이루고 있다. 수직이 뒤집혀 수평이 되어버린 형국에서 그사이의 공간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공간을 체계화하던 단위의 전환 - 높이에서 면적으로 – 과 공간을 구획하던 물리적 구조의 기록과 번역의 변주 사이에서 이제 우리의 인식은 더욱 독창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입체화한다.
한편, 전시장의 끝에 거의 잡히지 않을 듯 들어선 공간 두 개가 있다 (<너무 멀리서 그린 그림 1 & 2> (2024)). 가까이 다가설수록 작고 큰 면적 위를 수놓은 연필 선이 작은 공간을 나름의 양식으로 설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작가는 긴 장대 끝에 연필을 달고 단순한 형상을 그려보았지만, 시력의 한계로 자신조차 형상의 성패를 확인할 길 없는 드로잉을 그렸다. 더 이상 형상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신체의 연장과 시선의 단절 사이에서 허공을 가르는 몸짓의 통제이며, 이곳의 절제된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사라진 저곳에 만들어낼 흔들림의 궤적이다. 애초에 시각성은 한계가 분명한 역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부재의 몰드>연작(2024)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공을 가설한다. 고무 재질의 내피와 그 바깥을 단단하게 유지해 주는 외피가 결착된 형식으로 제작된 본 조각은 몰드 제작 방법 중 2중 몰드를 만드는 방법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다만 내부의 원형이 부재한, 그저 몰드의 면들이 밀착되어 구조화된 작업에서 관객의 시선은 내부의 공간이 아닌 그것의 형상, 더 나아가 표피의 흔적으로 먼저 향하게 된다. 공간을 가로지르듯 늘어선 조각은 높이를 달리하며 서로 관계를 형성하고, 때로는 동판 위에 상대적으로 보다 다이나믹하게 남겨진 흔적 - 작가의 행위 - 을 필두로 부피가 아닌 표면에 시선을 안착시키다가도(근경), 세 개의 면(중경)과 네 개의 면(원경)으로 이어지며 피부가 아닌 부피로, 평면이 아닌 입체로 시선의 범위를 연장, 확장한다.
이제 공간을 울리는 음성을 따라 <빈 공간을 모각하기>(2024)를 보자. 해당 영상에서는 불이 켜진 빈 극장을 배경으로 두 명의 화자가 선문답을 주고받는 중이다. 하지만, 스크린 앞의 공간을 대상으로 모각을 시도하는 조각가와 그것을 촬영-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움직이는 감독의 대화와 시선은 끊임없이 어긋나고 미끄러지길 반복한다. 애초에 스크린이란 이미지가 상영됨으로 시공간적 가치를 획득하는 여백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관찰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명료하게 담아내려는 카메라 감독과 ‘만드는 모양이 정해져 있냐는 질문’에 ‘정해져 있지만, 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대답하는 조각가의 시선은 처음부터 만날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카메라가 담아내는 화면에서 우리는 두 화자 이외에도 공간을 차지하는 여러 시선의 주체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극장 공간을 정의하는 여러 요소의 위치에서 빛과 어둠, 시간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주체들이다. 영상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재현된 형상은 그 너머의 가능성을 탐색하듯, 그리고 카메라 속 인물들의 서사가 화면 밖 환경과 조건으로부터 추동되듯, 보는 것을 초월해 생각하고 감각하려는 순간들 속에서 확신은 이내 무너지고 의심은 다음의 확신을 확인하기 위해 나아갈 뿐이다. 예언과 계획 사이 어딘가에서 발생하는 순간이자 사건일 뿐이라는 영상 속 조각가의 말처럼 말이다.
본 전시에서 김인배는 ‘없음’을 모델링하거나 캐스팅하고, ‘사라지거나, 시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태여 바라본다. 그리고 비가시적인 상태나 상황을 사고 영역의 확장을 위한 촉매제로 상정하고, ‘보는 행위’를 대리/ 매개하는 조각적 실험을 시도한다. 이렇게 전시는 논리와 감각, 실재와 상상, 현실과 상징 사이를 오가며 존재하지만 인지하지 못했던 시공을 자각하길 요구한다. 없는 것을 본다는 것은 시각의 체계에서 벗어난 조건을 가늠하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구축된 체계의 목록 바깥의 것들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모종의 순간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각의 바깥에서 일상의 조건은 뒤틀리고, 그 어긋난 틈새로부터 예상치 못한 정동적 감각으로 충동하는 시공이 가설된다.
크레디트
참여작가 : 김인배
기획/ 글 : 김성우
디자인 : 강문식
공간조성 : 무진동사
사진 : CJY ART STUDIO (조준용)
후원 : 서울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