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뮬라

한때 예술은 그 마술적인 상상력으로 때로는 연금술에 비견되기도 했다. 보편적 논리를 뛰어넘는 창의적 사유를 작동하여 현상을 초월하는 깊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두 분야 모두 단순한 물질을 넘어 영적인 차원에 다가서거나, 깊은 의미의 통찰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유사함을 지닌다. 연금술에서 사용된 상징들은 물리적인 변화를 초월하여 정신적인 영역에 다가서게 하였다. 미술 역시 상징적 언어의 도입을 통해 의미나 감정을 전달하고 표면의 형태를 넘어 깊은 생각이나 체험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목적을 지닌다. 상상력과 정신적 탐구에 대한 공통된 목표 차원에서 이 둘은 상호작용을 한다. 한편, 그런 성질적 유사성은 흥미로운 만큼 낭만적이고, 참신한 만큼 비논리적이기도 하다. 연금술과 같은 선상에 놓은 예술의 마술적 속성이 다소 순진하게 들린다면, 그것을 현실의 삶과 연동시켜 우리가 발 붙인 땅에 안착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본 전시는 연금술이 아닌, 일종의 화학적 촉매 현상 을 예술의 곁에 잠시 둬보고자 한다. 이는 재료와 형상 사이 필연적인 연결 구조를 살피는 일임과 동시에, 그 궤도에 틈입하는, 혹은 내재하는 의외의 것들을 들추는 일이다. 이를테면, 멈추어선 조각에 내재하는 서사성이나 시간성, 조각 위에 새겨진 신체성, 공간과 공조하며 획득하는 형상 너머 제2의 운동성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창작자와 작품, 수용자 사이의 복잡한 상호 작용까지도 포함할 수 있겠다. 작가는 생각과 감정, 경험과 지식 등을 일종의 다양한 원소라 부를 수 있을 재료에 투영, 혼합하고 이를 동원하여 작품의 형상에 다가선다. 그러므로 작품은 일종의 화합물과 같이 다양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재료는 색채와 질료 등으로 형태와 텍스처를 결정짓고 이 모든 것은 작품이란 결과물의 ‘분자’를 형성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작품은 재현된 이미지 너머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수용자는 작품과의 상호 작용에서 화학적 변화를 경험하는데, 감정적, 정서적 반응, 즉 정동의 순간을 촉발하며 사고의 화합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촉매’와 같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망 안에서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이 역시 점진적으로 증가, 축소하는 (문화적) 화합물의 변이적 성질을 지닌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본 전시는 예술을 마술적 상상력에 기대어 놓기보다는, 개념과 형식 사이에서 동시대를 사유하는 작가의 태도와 시선에 기인하는 필연적 산출물로 이해한다.

그간 수집한 사물이라는 개별 단위의 조합을 통해 군집의 조형적 아우라를 탐구하던 권용주는 그의 조각에 ‘안료’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지난 <캐스팅>연작 (2018-)에서 작가는 그러모은 사물을 캐스팅 기법을 통해 탈색시키고, 보다 강한 결속의 구조로 총체적 형상이 지닌 운동성을 극대화하였다. 표피의 단서를 최소화-탈색-함으로 조각의 내적 조형성이 지닌 아우라에 주목한 것이 지난 작업이라면, 이번 작업은 그 시선을 다시 표피로 끌어와 내부와 외부의 충돌과 조화 사이 균형의 단서를 탐색한다. 이를테면, 안료는 염료와 다르게 녹지 않는 결정의 형질을 유지하기에 원재료의 성질을 유지한다. 이는 곧 안료와 섞이는 타재료(석고 등)와의 조화 (불)가능성을 의미하며, 때로는 다른 색과의 화학반응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로 발색 된다. 색이라는 언어적 단위로 규정짓기엔 의도와 우연 사이 반응으로 보아야 함이 마땅한 표면은 무수히 많은 층이 누적되는 과정에서 마지막 표피의 결과값에 이르기까지의 변이이며, 보이지 않는 인과의 증거일 뿐이다. 또한 조각의 형태적 이해 차원에서 ‘안료’는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색이 지닌 선명함은 조명 아래 명암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조형적 구조를 타고 흐르고, 조각의 내피에서 이전에는 자각한 적 없던 구겨진 형상의 내부로 시선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형상은 보다 유기체적인 인상으로 변모하며,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을 선사한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안료를 발라낸 흔적은 흘러내리고 굳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종유석처럼 층을 이루며 가상이 아닌 현실 속 조각의 조건을 환기한다. 적당한 점도에서 시도되어야 하는 덧바르기는 화가의 스트로크처럼 작가의 움직임을 표피에 담지하며, 발판에 쌓인 작은 퇴적층에서는 신체성이 전환된 시간성을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안료’라는 대상이 지닌 산업적 측면을 떠올린다면, 제국주의 역사와 노동자의 삶과 같은 서사로 확장할 수도 있다. 권용주는 특정 색이 지닌 의미에 기대기 보다는 ‘안료’의 성질 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최근의 개인전 《포털》(2022, 아마도예술공간)의 제목이 상기하듯, 그의 조각은 내부적 논리와 외부의 서사를 연동하고, 의미를 개방하며, 가상과 물질, 허구와 현실의 상황을 매개하는 경로로 작동한다.

오늘날의 이미지는 높은 해상도로 매끄럽게 재단되고 선명하게 기록되어 고정된 현상-사실 이외에 그 무엇도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프레임 바깥의 서사는 깔끔하게 절단되고, 맥락에서 탈구된 정보값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이삭의 작업은 온전히 기록할 수 없기에 서사를 가능케 하고, 고정할 수 없기에 정해진 형식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유동하여 잡히지 않는 강물, 한강이라는 장소에 주목한다. 그리고 변화하는 대상, 사건을 통해 생동하는 장소를 재현하기 위해 시점을 달리하고, 광학적인 오류를 수용한다. 우선 그는 장소로서의 한강을 대리하기 위해 그가 딛고선 자리에서 만나는 퇴적물(흙)로 판재를 제작하고, 그 위에 부유물(나무와 유리)로 만든 유약을 바른다 (<윤슬>(2023)). 높이가 다른 각 면은 기대어 선 채 서로 다른 시점을 허용하며 시선을 수렴하거나 튕겨내길 반복하고, 표면에서 타거나 남겨진 유약의 흔적들은 빛을 반사하거나 머금으며 초점을 교란한다. 그렇게 파편화되어 해체되었다가 다시점의 면들로 다시 축조된 한강에 대한 인상은 전시 공간에서 물리적 거리를 두고 가깝거나 멀게 배치되어 좌표값을 이룬다. 이는 관객의 움직임을 발생시키고 평면적인 각 면에 입체적인 층위와 깊이를 창출하며 작가의 그때 그 공간을 오늘의 서사적 시간으로 재구성한다. 마치 야외 사생에서 그 형식이나 화면 구성의 논리는 대상의 재현인 동시에 화가의 현존을 얘기하듯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는 강물에 반쯤 잠긴 채 부유하는 사물을 관찰한다. 그는 이들을 3D스캔하는데, 수면을 중심으로 드러난 면과 가려진 면, 미묘하게 물의 흐름을 따라 흔들리는 대상은 표면의 정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필연적인 광학적 오류를 외피에 간직한 채 출력된다. 이러한 면에서 <닻-부표>(2023)는 조각이기 보다는 광학적 증거물로서 사진적 기록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사물의 조형적 외피를 넘어 ‘물’의 유동성을 환기하기 때문에 사진의 언어, 즉 대상의 외양적 사실보다는 존재의 방식을 폭로하는 식이다. 그렇게 문이삭의 작업은 경험에서 비롯된 이미지를 수용, 소비, 편집,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장면들의 연속체와도 같다. 그가 마주하는 장소의 감각은 시점을 달리하며 여러 측면의 표정들을 포착하여 하나의 조형으로 압축, 구현하고 이를 다시 공간으로 확장하는 방식에서 마치 영화적 시퀀스의 중첩으로 실현된다. 또한 시선이 닿지 않는 사물의 이면을 재현의 영역에 포섭함으로 대상의 본성을 일깨운다. 결국 작가는 한강이라는 보편적 이미지와 지금, 여기에서 감각되는 모습의 간극에서 생성과 전이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멈춰선 채 움직임을 추동하는 풍경으로 제안한다.

재료와 형상 사이에는 물리적 증거와 함께 여러 사변적 조건들이 공존한다. 화학작용에 빗댄 예술에서의 발견은 종종 예측을 넘어서는 결과로 귀결되며, 표피를 둘러싼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관계는 이미지로서의 대상에 내재하는 다층적 잠재성을 들춘다. 이는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라기보다는 재료와 형상의 가까이에서 연쇄하는 의미의 접점을 살피거나, 때로는 비약과 같이 먼발치에서 연관을 주장하는 것 과도 같다. 그리고 상상적 재조합이나 허구와 가상의 자유로운 접목까지도 허가함으로 작가 자신의 현존과 삶에 대한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참여하는 두 작가 문이삭과 권용주는 일상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재료를 수집하고 여기에 고유의 조형 논리를 덧대어 형태로써 의미를 기입하는 동시에 사유의 지평이 제한되지 않도록 한다. 재료에서 형태로 나아가는 궤적에서 왜곡되고 새롭게 열린 의미의 지평은 파편과 총체적 합을 의식하게 하며, 의식과 무의식, 객관성과 주관성, 필연성과 우연성, 투명성과 불투명성의 영역을 가로지르고 가능성으로 머물렀던 생성의 열망을 실현시킨다. 화학적 작용이 그러하듯 반응하고, 충돌하고, 조합하고, 발생되는 모종의 과정을 거닐며 말이다.

크레디트

참여 작가 : 권용주, 문이삭
기획 / 글 : 김성우
디자인 : 강문식
공간조성 : 무진동사
사진 : CJY ART STUDIO (조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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