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UAL

하얀 공간이 있다. 백지와 같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텅 빈 공간이다. 그저 전시를 위해 최소한의 물리적 기능만을 지닌 곳이다. 우리는 이 하얗고 텅 빈 공간을 중립적인 공간, 혹은 화이트큐브라고 부른다. ‘이상적인 상태’라고도 달리 말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외부적 요인의 간섭 없이 순수하고 절대적인 상태로 작품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교회가 지닌 신성함, 법정이 지닌 형식성, 실험실이 풍기는 신비성’을 표방하며 발명되었지만, 곧 관람자들의 육체를 소멸하고 그들의 경험을 제한된 시각 안에 머물도록 강화하였다. 이곳에서 관객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파편화해야만 했고, 그 조각들을 다시 모아내는 환영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오늘날 전시 공간의 규준이 되어버린 화이트큐브는 중립성을 필두로 전시된 작품의 의미까지도 공간으로 빨아들이는, 그 자체로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러한 물리적 조건과 그것이 배태한 담론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어, 그 무엇도 들어선 적 없는, 말 그대로 중립적 시공을 상상해본다. 아직 어떠한 정체성도 획득하지 않은 상태, 그렇기에 공간은 무에서 유로 향하는, 장소가 된 적이 없기에 어떠한 의미도 담아낼 수 있는 하나의 가능태일 뿐이다. 그리고 순백의 공간이 지닌 물리적 조건을 떠나 ‘전시’라는 언어를 공간의 전면으로 내세우는 순간 빈 공간은 (어쩌면 낭만적인 시선으로) 특별한(듯 보이는)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전시는 그 의미에서 형식에 이르기까지 삶의 양식과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다양한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종종 제도권의 전시는 다성적 층위를 지닌 작업을 모아 하나의 주제어에 결박한다. 긴 문장이나 시적 언어가 지닌 풍요로운 화음보다는 직관적으로 의미 전달이 가능한 키워드를 선호한다. 때로는 이견의 제시나 현상의 작동원리를 밝히기 위한 질문보다는 소개와 단언으로 종결한다. 현상의 표면을 스치는 강력한 논지는 선명하고 단일한 이미지로 주제를 견인하지만, 복수의 풍경을 생성하는 뼈대를 축조하지는 못한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감히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전시로부터 주어진 가능성의 여지는 곱씹어 볼 만하다.

한편, 오늘날 산업 자본과 동행하여 스펙터클을 양산하는 다수의 전시들이 취하는 형식(event)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하지만, 이는 온전히 시선을 자극하는 만큼 확장된 사유를 위해 동원될 여타 감각의 여지를 삭제하거나 마비시킨다. 감각적 유희에 초점을 맞추어 시각을 중심으로 재편된 이미지의 정밀함은 대상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지만, 동시에 시선을 압도하는 오늘의 해상도는 프레임의 경계를 강화하여, 형태 너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게 만든다. 어느 순간 컴퓨터의 스크린과 손안의 액정을 채우는 이미지는 감각의 기원이 되었고, 서사와 의미를 소거한 채 물질의 부피를 획득한 작품으로 육화하여 현실의 영역에서 충동적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높아진 해상도와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기술의 발전, 일상이 되어버린 디지털 환경은 물리적 거리와 시간의 제약을 초월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존재의 깊이를 얄팍하게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깊이와 두께를 상실한 이미지는 시간의 감각을 흔들어 놓았고, 감정과 정서의 온도는 소거되어 투명하고 차가운 표면 위, 또는 과잉 상태로 흩날리는 이미지의 파편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 이는 특정 장소의 밀도 높은 경험, 사유를 촉발하기보다는 찰나의 스쳐 지나는 단상 차원으로 대상을 환원해 버리기 일쑤이다.

여기에 더해 전염병의 창궐은 이러한 존재의 얄팍함을 더 이상 이미지 환경에만 머무르도록 하지 않고, 기존 제도와 시스템을 심문하며, 급격하게 기존의 환경과 조건을 바꾸도록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날의 전시 시스템과 그 경험까지도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당도했고,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급격하게 전시의 형식을 대체해야 하는 상황을 겪기도 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전시는 물리적인 제약을 넘어 자유로운 접속을 가능케 하지만, 동시에 온라인 시스템 구축 과정에서의 프로토콜이나 일방향적 주문을 수행해야 하는 수동적 상황을 전제하기도 한다.

이는 출발지에서 목적지를 일직선으로 잇는 경로에 수동적으로 몸을 맡기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항해술은 경로 사이로 새어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선형적인 경로 바깥의 것이 틈입할 여지도 없다. 하지만, 전시는 지도(map)와 같다. 지도는 그 자체로 이미지이며,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고 돌릴 수 있는 매체이다. 지도 제작(cartography)의 관점에서 보자면 목적에 따라 중심과 주변을 새롭게 설정하고 비율과 축척을 편집함으로 기존 질서의 전복을 상상할 수도 있다. 설정한 문맥에 따라 현상 아래 사회의 움직임을 드러낸 새로운 지형도가 가능해지며, 정치적 구조와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거시적 세계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도를 제작하고 사용하듯 전시의 시간은 온전한 주체를 위한 시간이다. 청자가 화자에게 이견을 내거나, 사용자가 서사를 잠시 멈추어 자신만의 시공을 개발하길 허가하지 않는 내비게이션이 시스템이 아니라, 지도라는 틀 안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때로는 미로와 같은 길에 맞닥뜨려 헤매기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전시이다.

전시를 능동적인 대화와 질문의 형식에 비교할 수도 있겠다. 전시는 특정 주제를 시공의 형식으로 소환하여 작품의 언어를 경유하고, 시간적 서사로 확장하는 공론의 장이다. 전시의 전후로 개입하는 창작자와 관객은 질문 섞인 대화의 연쇄에서 의미의 풍성함을 더해가고, 서로가 나누는 온도와 호흡은 공간을 채운 이미지의 여백 사이를 메꿔간다. 이곳은 학습된 것을 다시 확인하는 장이기보다는, 배운 것을 의심하고 다르게 보길 권장한다. 그리고 대상이 지식으로 승인되는 역학, 그 지식과 권력의 관계까지도 고민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성과 지식의 역사 아래 발명된 양식의 기원을 다시 살피고, 대상과 외부 세계가 맺는 관계망을 헤적이며, 그 과정에서 말없이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조명한다. 이미 쓰인 역사와 비공식적 개인의 서사, 제도와 현장, 동시대와 지금, 여기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우리가 마주하는 오늘의 현상을 공동의 대화를 위한 명제로 삼는다.

‘전시’라는 형식적 토대 위에서 《MANUAL》은 오늘날의 자동화된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리거나, 혹은 눈과 뇌를 마비시키는 스펙터클의 전략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육체적 노동, 혹은 수동’, 또는 ‘활동의 기준이나 수순을 나타내는 문서 - 설명서’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 ‘MANUAL’이라는 이름과 같이 신체의 감각과 주체적/ 능동적 사유에 기반한 자유로운 시공으로서의 전시를 상상한다. 이를 위해 작품에서 전시로 향하는, 또는 반대로 전시로부터 작품으로 소급되는 길목에선 몇 가지 조건을 다루어 본다.

로와정은 미술이 가진 해석적 (불)가능성에 주목한다. 전시 공간 안에서 이미지로 작동하는 텍스트와 텍스트로 작동하는 기호로서의 미술, 이 둘의 상관관계는 해독 불가한, 그렇기에 광활한 해석의 지평으로 관객을 유인한다. 작가는 맞춤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리드미컬한 드로잉이 된 텍스트와 건너편에 걸린 문장 없는 부호를 통해 해석의 입구를 살짝 열어 놓는다. ‘번역’이란 미술 자체의 다성적/ 다층적 의미를 발굴하기 위한 접근법이자 타인의 독창적 해석이 틈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머지〉는 시공의 형식을 빌려 유희적인 제스처로 이미지-텍스트의 퍼즐을 펼쳐놓음으로 미술이 의미를 발생시키는 구동 원리를 곱씹고, 조금 더 능동적으로 현상 너머 또 다른 의미의 층위에 다가서길 기대한다. 한편 미술의 내적 논리로부터 질문을 시작하는 로와정의 작업은 홍승혜의 작업을 작동시키는 ‘장치(prop)’가 되길 자처함으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물리적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홍승혜는 타인에게 건네는 가벼운 말과 한 쌍의 조각으로 모종의 무대를 상상한다. 우선 머리와 몸통, 그리고 팔과 다리의 최소 단위로 인간의 형상을 한 조각들은 ‘관객’과 관객이길 ‘자처’하는 오브제 사이를 오가며 또 다른 의미 발생의 주체인 관객의 위치를 묻는다. 다시 말해, 이들은 ‘관객’이라는 이름으로 전시장을 방문하는 관객을 관람하는 능동적(인 척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동시에 관람객으로 하여금 해체, 분해될 수동적 객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관객〉(2022)은 ‘수동’과 ‘능동’ 사이를 오가며 시선과 실천 사이 능동적 행위와 모드를 활성화하는 단위가 된다. 이제 해체된 인체(조각)는 언제든 재조합/재구축될 가능성을 가지며, 변증법적 구조 안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을, 시공을, 세계를 발생시킨다. 한편 공간의 안쪽 깊숙이 영사되는 〈move〉(2022)는 관객에게 건네는 지시문이다. 움직이길 요구(move)하며 분열하는 텍스트는 스스로 고정된 의미에 정착하길 거부하는 해체의 몸짓으로 언어의 결계 너머로 향하게 하며, 김민애의 〈새〉가 벽 위로 드리운 그림자로 확장하여 새로운 시공의 차원을 끌어낸다. 어쩌면, 이는 오늘날 공동체라는 공허한 수사에 조금이나마 다가서길 바라는, 그래서 너와 나, 우리를 포용하는 작은 무대이자 우주까지도 상상하는 주문과도 같아 보인다.

기존에 장소의 역사를 소환하고, 공간의 물리적 구조에 기대어 경험적 서사를 촉발하는 작업을 선보이던 김민애는 이번에 그 반대로 공간에 기대지 않는 작업을 상상한다. ‘장식성’을 앞세운 그의 조각들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형상과 매끈하게 재단된 미감, 군더더기 없는 형태를 통해 문자 그대로 공간을 ‘장식’하고 있다. 장소 특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차원의 맥락을 차용하기보다는, 온전히 식별 가능한 형상과 표피적/ 시각적 감각을 전면에 앞세운 이 조각들은 당대의 취향을 바탕으로 장식의 가치를 획득하기에 ‘현재성’의 논리로 작품을 둘러싼 공간을 조율하려 한다. 이는 마치 비물질적 가치를 극화된 형상으로 시각화하던 조각의 역사로부터 벗어나 주어진 상황을 통제하고 조율하려는 기념비의 공허한 몸짓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반투명한 재료를 통해 빛을 투과하거나 반사하고, 타 작업을 자신의 신체 안에 비추어 냄으로 오브제와 장소가 공조하는 관계로 다시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서사의 출처가 되길 시도했던 이 작업들은 공간의 일부로 흐트러지며, 그 과정에서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운 서사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길 시도한다.

완전하게 맞닿을 수 없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간극(로와정)은 물리적 형식-전원 공급의 방식-으로 광원(홍승혜)을 작동시키고, 그 빛은 허공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오브제(김민애)의 공허함을 들추며 이미지 너머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본 전시의 개별 작업들은 그 자체로 의미의 총체이자 분절된 이미지의 연속성을 이끌어내는 장치이다. 전시는 재현된 외형 너머에 다가서기 위해 오히려 적극적인 형상을 도입하거나, 서로 얽히고설키는 가운데 형상 사이 행간으로 눈을 향하게 하며, 내적 논리를 취하는 동시에 자가 분열하여 시공의 확장을 도모하고, 그렇게 지금, 여기의 발 딛고 선 시공을 보다 입체화한다.

오늘날의 전시는 어디쯤 도달했는가? ‘전시’라는 이름은 변한적 없지만, 그 성질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되어 발전해 왔다. 《MANUAL》은 상상의 지시서(manual)로 작동하는 전시를 육체로(manual) 감각하며, 주어진 룰을 따르는 ‘수동태’가 아닌, 스스로 분절된 이미지를 서사로 직조해야 하는 ‘능동태’로서의 관객을 요구한다. 그리고 전시의 환경과 조건에서 시작하여, 전시(장)의 물리적 조건이 아닌, 개별이 경험하고 상상하는, 하나의 전시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복수의 시간과 풍경을 고민한다. 이는 전시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의 연동과 연쇄 속에서 가능했던 주체의 능동적 사유를 기대하는 일이며, 그 모든 것을 작동하게 했던 전시라는 이름의 시공 그 자체를 반추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시는 그 자체로 온전한 주체의 능동적 시간을 바란다. 그것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몸소 나누는 일이며, 거의 무한한 지평을 향해 열려 있다.

크레디트

참여 작가 : 김민애, 로와정, 홍승혜
기획 / 글 : 김성우
디자인 : 강주성
공간조성 : 날씨
사진 : CJY ART STUDIO (조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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