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nting air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오늘이다. 내일은 오늘로, 그리고 곧이어 어제가 된다. 미래가 과거로 녹아드는 그 순간이 바로 현재의 순간이다. 앙리 베르그송의 말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는 실제로 구분되지 않으며, 내적 경험의 흐름 속에서만 존재한다. 매일의 시간을 나누는 단위, 즉 하루나 시, 분, 초와 같은 정량화된 값은 선형으로 일상을 관통하는 어떤 흐름을 시간의 단위로 측정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의 기제일 뿐이다. 우리는 그저 끊임없이 축적되는 과거와 연속해서 발생하는 미래 사이 일상이라는 형식으로 반복하는 오늘을 통과한다. 이렇듯 일상은 특별할 것 없는 서사와 사건으로 그득하다. 거대 담론의 퇴거 이후 그 자리를 대체한 ‘일상’조차 담론으로서 작동하게 되어버린 오늘, 본 전시 《Counting air》는 담론화된 일상에서 미끄러지고 그 주변을 공전하는 모종의 서사, 생활의 새로운 발견에 주목한다. 이는 조금 더 미시적이거나 내밀하며, 보다 사적인 삶의 파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생활에서 때때로 마주치는 우연적 순간은 마치 사고처럼 각인되고, 켜켜이 누적되어 삶의 양식과 태도를 조직하는 원형처럼 자리한다. 여다함은 삶의 반경에서 우연히 마주한 흔적들, 길가 담벼락에 무분별하게 붙이고, 찢기고, 다시 겹친, 그 층층이 쌓인 전단의 흔적에 주목한다. 이것은 매우 익숙한 도시 풍경의 일부여서 흥미를 끌기 어렵지만, 다시 보면 정갈하게 단장한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야생성을 간직한 풍경이다. 지움과 더함, 가려지고 덧입히는 과정에서 정보는 사라지고 그저 존재했던 증거로만 이루어진 이 이미지는 마치 출처를 알 수 없는 씨앗이 뿌리내리고 하나의 생태를 이루듯, 삶의 터전에 깊숙이 침투하여 끊임없이 소멸과 증식을 거듭한다. 도시의 질서를 위반하고 무분별하게 방치된 흔적들은 일종의 카오스와 같다. 얇게 중첩된 이미지는 무질서하게 뜯기고 남겨진 채움과 비움의 관계 안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온전치 못한 상태의 전단은 불투명하게 누적된 과거의 단층으로 형식화되고, 관계 없는 이미지와 정보는 틈새를 비집고 충돌하며 현재로 드러난다. 목격자 나 먼지 에 빗대어 삶의 형식을 발견하고, 또 그 태도에 대해 질문하던 작가는 <부싯>(2023)에서 마치 벌목꾼과 같이 이들을 채집-기록하고 분류하는 방식으로 발견의 현장에서 떼어내, 반복과 변주의 과정을 거쳐 그로부터 패턴을 추출해낸다. 이는 카오스로부터 규칙을 발견하는 일이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추출한 패턴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가지런한 배열이 아닌, 무심함 가운데 고개를 드는 형상이다. 반투명한 지류 위에 옮겨진 패턴은 그 자체로 무질서와 질서 사이를 오가지만, 이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지탱하는 그리드에 있다. 수직 수평으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그리드는 반투명한 막의 앞뒤에 위치하며 때로는 그림자(이미지)로 획득한 질서(패턴)을 해체하고 확장하거나, 때로는 쉽사리 의미를 포착하기 어려운 현상(패턴)에 또 다른 규율과 조건을 더해 형상을 새롭게 재단한다. 이렇게 거리 위의 찢긴 상흔들은 서사가 모호한 일상에 리듬을 부여하고, 시선을 따라 매 순간 새롭게 사건화된다. 이는 마치 우연한 마주침에서 시작하여 자연과 도시, 무질서와 질서, 작위와 무작위, 우연과 필연, 평범과 비범과 같은 이항, 혹은 이질의 접촉면에서 발생하는 마찰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6장의 시퀀스-사진과 한 편의 글로 이루어진 <새벽에 토끼가>(2023)는 작가 자신이 꾼 꿈에 기반한다. 다만, 그는 이 꿈의 내용을 드라마틱하게 전달하거나 감상적인 차원에서 소비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꿈’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하루의 활동이 종료되는 시점에 시작해서 다음 날의 활동 사이를 잇는, 그래서 일상의 연장에 있지만 그로부터 이탈하는 꿈의 감각적 가능성에 주목한다.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해 서로 다른 상상으로 귀결되는 작가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이 흩어지는 구름의 기록 사진과 함께 병치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중심에 선 실재 대상보다는 여섯 명의 인물이 서로 다르게 보고 기억하는 현상에 있다. 여다함은 꿈을 통해 가능해지는 비논리적 세계와 이성으로 대변하는 현실을 이접함으로 마치 기체-액체-고체 라는 서로 다른 형질의 이어짐과 같은 순환의 감각을 떠올리게 하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세계,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조건을 새롭게 감각하기를 제안한다.

때로는 반복의 형식은 반성의 감각을 일깨우며 그저 흐르기 바쁜 일상에 더할 수 없는 깊이와 균열을 선사한다. 기존에 ‘반복’을 통한 ‘자기 폭로적’ 방식을 채택하였던 최윤석의 방법론은 일견 너무나도 일상적인 광경을 담아내고 있기에 관객과 작품 간 거리감이 부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거듭되는 반복의 과정에서 어느 순간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튕겨 나가고 그들에게 부과되는 것은 반복에서 각성으로 이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추이다. 예를 들면, 2020년 5월부터 2023년 9월까지 주로 오전 끼니를 때우기 위해 만든 계란프라이를 촬영한 200여 장의 사진기록 모음(<유감입니다> (2023))은 중간중간 삽입되는 계란에 얽힌 문구-영양 성분, 격언 및 속담, 유명인의 언급 등-와 이어지고 그 선형적 구조에 비선형적인 어긋남의 정서를 촉발한다. 마치 상징적 도상처럼 등장하는 계란프라이는 끊임없는 반복 안에서 무의미로 격하되고, 때로는 다시 언어와 만나 의미를 획득하는 지루한 되풀이를 함으로써 트랜스의 상태를 만들고 곧이어 차이와 거리를 발생시킨다. 그렇게 작가의 일상적 루틴에서 비롯된 자기 고백은 내밀한 일상을 향한 관음증적 시선과 작가와의 동일시 사이를 오가며 이내 보편적으로 논의될 수 없는 개인의 서사와 함께 각자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메아리2, 3, 4>(2023) 연작 은 작가의 자기 참조적(self-referential) 특징이 특별히 도드라지는 연작이다. 본 작업은 심야, 동틀 녘, 그리고 잠시 담배를 입에 문 시간과 같이 타인과 유리된 시간대에 작가 자신을 출연시킴으로 보다 극적으로 기다림의 정서를 환기한다. 하지만, 최윤석의 영상 작업은 원인과 결과라 할 수 있는 서사적 구조를 취하지 않으며, 심지어 감각적 어긋남이나 미끄러짐에서 비롯된 정동의 순간 역시 부재하기 때문에 사건적이기 어렵다. 결국 복선과 같아 보이지만, 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상은 마치 맥거핀과 같아서 근원을 알 길 없는 감정과 해소되지 못하는 긴장의 정서만으로 공회전한다. 그렇게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하거나, 클라이맥스도 없이, 그저 원인과 결과가 배제된 영상 앞에서 기다림은 이내 지루함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지루함을 사유의 영토로 해석하려 했던 벤야민의 시선에 기대어 보자면, 이 지루함이 오히려 깊이 있는 사유와 고찰을 가능케 하며, 이로부터 모종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여기에 더해 영상과 함께 거치된 헤드셋의 사운드는 작업 속 인물의 숨소리나 심장박동 소리에 집중하게 함으로 타인의 일상 환경을 관조하던 관객의 시선을 급격히 작품 속으로 끌어당겨 다가서게 함으로 관객과 대상 간 심리적 거리를 재설정한다.
이렇듯 자기 참조와 반복의 형식 사이에서 관객의 각성을 요구하는 시도는 (2023)에서 조금 다르게 연장된다. 작가가 그간 모은 스티커 조각과 더미는 그의 삶에 침투한 사물, 하지만 그 어떤 상징적 가치조차 말소된 것들이다. 스티커를 수집하고 붙이는 행위는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취미이자 자기표현의 수단일 수 있지만, 스티커를 뗀 후 남은 자투리는 그것이 군집하든 낱개로 존재하든 특별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최윤석은 행위 뒤 남은 아주 미천한 잔여물과도 같은 이것들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공간에 기대어, 혹은 자연스럽게 공간에 모여선 이들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공간)이자 그곳을 채우는 사물, 그리고 누군가의 흔적이며, 그 작은 진동이 환기하는 불안정한 심상은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을 깨우는 몸짓이라 할 수 있다.

보편적 삶이란 언제나 그렇듯 흘러가는 일의 연속이다. 이는 스치는 순간의 연속 안에 위치하는 (발생이 아닌) 사라짐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담론으로서의 ‘일상’보다 조금 더 긴밀히 삶의 형태를 그려내고자 다른 언어를 동원하는 것은 또 다른 모순일 수도 있겠다. 삶과 생활, 그리고 일상을 가로지르는 우리의 모습은 그 어떤 말로 대리하는 것보다 예술만이 번안해 낼 수 있는 형식과 표현으로 본래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본 전시는 원인과 결과가 소거된, 아직 미처 사건화되지 못한, 그래서 반복하는 패턴과 반복의 형식으로 번역한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하듯 흘러간 서사화될 수 없었던 서사들, 사사롭거나 대수롭지 못한 사건은 때로는 반복의 규칙과 형식을 통해 오늘을 일깨운다. 이는 거창하고 묵직한 언어로 서술, 묘사된 세계도 아니거니와, 현실을 탈주한 상상적 세계도 아니다. 무질서의 질서를 발견하는 일(여다함)과 사건이 소거된 일상의 반복을 관조하는 것(최윤석)으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아닌, 오히려 삶에 보다 깊이 발붙인 우리의 자리를 천천히, 하지만 섬세하게 감각할 수 있게 된다.

크레디트

참여 작가 : 여다함, 최윤석
기획 / 글 : 김성우
디자인 : 강문식
공간조성 : 무진동사
사진 : CJY ART STUDIO (조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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