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이미지는 각자의 취향에 맞춰 실시간으로 생산, 소비된다. 핸드폰 액정에서 컴퓨터의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실체 없는 이미지와 물질로 재현되어 실재하는 이미지들은 사적 공간에서 공적 공간, 거리와 건물 내부, 어디에든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가 단순히 보여지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익숙한 사실이다. 미술에서도 뒤샹에 이르러 망막에 호소하던 미술은 개념적 전회를 맞이했지만, 오늘날 일반적 이미지 소비의 양상은 우리 지각의 깊이를 망막적(retinal) 현상 차원, 대상의 표층부에 머무르게 하곤 한다. 이미지는 그것의 기원이나 의미, 문맥 차원에서 가치를 찾기보다는 보다 자극적이고 강렬한 시각 중심 생산물로 다루어진다. 시쳇말로 ’감각적‘이다 라고 얘기하는 다수의 생산물은 오늘날의 이미지를 사유의 대상보다는 시각적 유희 차원에 놓는다. 심지어 오늘날의 SNS 플랫폼을 통해 접하는 사진-이미지는 기록된 표층을 더 얇고 매끈하게 만들고, 시장 중심으로 구축된 표피적 미감의 경향성은 이러한 이미지가 가진 의미의 지평을 축소한다. 근대성의 중추이자 핵심에 놓인 시각성은 그 선명함으로 인해 더한 신뢰성을 획득하게 됐지만, 한편으로 시각 너머의 불투명함을 인정하기 위한 사유와 감각의 가능성조차 삭제해버린다. 그렇게 기술의 발전과 그것을 담아내는 플랫폼의 강세, 자기 프로젝션 차원에서 발산된 이미지들이 만들어낸 경향성은 부피와 깊이, 혹은 서사에 이르기까지도 세련되게 재단하여 표피적 미감 (혹은 취향)의 일부로 편입해버리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미지 생태는 관찰자와의 거리를 좁힌다. 그러나 미적 판단은 관조적인 거리를 필요로 한다.
본 전시 ≪뼈와 살≫은 이러한 오늘날 시각문화의 속성에서 한 발짝 물러나, 이미지-살과 그 피부층 아래 존재하는 여러 의미망의 구조-뼈대를 살핀다. 이는 이미지에 내재한 출처에 초점을 맞추거나, 매체적 조건과 방법론, 더 나아가 서사적 가능성으로부터 오늘의 이미지가 소비되는 방식을 재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서로 다른 두 축에 존재하는 사진과 조각을 하나의 전시 아래 묶어낸다. 하지만, 입체와 평면, 무거움과 가벼움, 두꺼움과 얇음, 촉각과 시각 등 얼핏 대립하는 항으로도 보일법한 두 장르는 형식적으로 분류된 시작점에서 서로를 향하며, 물리적인 구분점에서 벗어나 조각과 사진의 교차점에서 ‘이미지’에 대해 논한다. 이는 프로세스와 결과물, 단편의 이미지와 모종의 서사, 말초적인 시각적 자극과 정동의 감각을 가로지르며, 사진과 조각을 통해 오늘날 단출하게 ‘이미지’라는 단어로 일축되는 현상의 ‘뼈’와 ‘살’을 살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전명은의 사진은 기록된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피사체를 경유하여 타인의 시간에 접속하게 하거나, 카메라에 담긴 대상의 움직임이나 고유의 생명력이 움트는 모종의 순간을 상상토록 한다. 본 전시에서 작가의 작업들은 시선의 거리와 깊이, 온도와 밀도를 달리하며 서로 긴밀하게 연동한다. 전시장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한 소녀의 사진 <수영>을 마주한다. 소녀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이다. 정면이 아닌 비스듬한 각도에서 화면 밖으로 두 눈을 온전히 향하지 못한 아이의 시선은 사색과 바라봄의 어디쯤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곧 거리를 두고 위치한 먼 풍경(<풍경은 멀어서 소리가 없다 (갈남마을) #1>)을 향하거나 시각으로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물질의 최소 단위, 결정(<풍경은 멀어서 소리가 없다 (겨울) #2>)의 이미지에 머무는 듯하다. 아이의 시선에 기대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시각의 바깥에서 어떻게 대상을 감각, 혹은 사유할 것인가? 작가가 촬영 대상을 맞닥뜨린 그때의 시간과 공간에서 시작하여 피사체로부터 환기하는 기억이나 상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시각 체계에 맺히는 상 너머로 개인의 기억과 경험에서 공동의 상상으로 이어지는 모종의 시간과 공간이 사그라들고 피어나길 반복한다.
또 다른 사진작가인 오연진의 작업은 사진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대체로 작업 메커니즘에 결부된 조건을 변주하며 마주한 의도와 우발의 경계면에서 획득한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사진에 대한 사진, 메타 사진적 입장에서 사진의 메커니즘 내부로 깊이 침투하여 건져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반영적 필름 (멜팅)>연작과 <오브젝트-쓰루>연작 역시 사진의 작업 과정에 존재하는 환경과 조건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기록된(혹은 남겨진)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여타 사진과는 다르게 표면 위 요철을 만들거나, 물질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또한 외부의 대상을 피사체로 삼지 않으므로 다분히도 추상적이다. 사진의 내부로 수렴하는 이러한 이미지는 외부 세계를 투영하기보다는 그 스스로 물리적으로 남겨진 흔적-사실인 동시에 관객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도래하지 않은 서사, 즉 심상을 담아내기 위한 공간이 된다. 한편, 액체와 고체를 오가며 이미지가 구축되고, 머릿속 기체와 같은 상상을 기대하는 두 연작 외에 전시장 입구 창문에 프린팅된 <기울어진 라멜라>는 안과 밖을 나누는 (반)투명한 막으로서 빛의 조건을 온전히 받아냄으로 광학기기인 사진의 속성을 환기한다. 여기에 더해 점진적으로 기울어지는 이미지의 연쇄는 창문의 ‘표면’에서 ‘깊이’를 끌어내는 동시에 공간의 안팎에 위치하는 대상(타 작가의 작업에서 공간을 거니는 관객에 이르기까지)을 어슴푸레하게 비춰냄으로 표피적 층위에 머무르는 시각성을 벗어나 운동성을 지닌 환영적 시공을 창출해낸다.
한편 조각의 측면에서 변상환의 조각은 서사적이며, 시간성과 운동성을 내재한다. 작가에게 겨울철 실외기로 흘러나온 물이 바닥에 떨어져 형성된 역고드름과 같은 형상은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이자 재료가 된다. <등가교환_고립무원(孤立無援)>에서 그는 하나의 조각-덩어리를 주조하기 위해 역고드름의 형태를 떠내고, 얼음이 녹은 물에 석고를 타서 형상을 떠낸다. 그러한 과정에서 역고드름에 남겨진 불순물은 온전히 조각에 포섭되고, 형태의 표면 내부 깊숙이 일상의 서사가 자리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석고라는 재료는 일상의 서사를 조각의 형태로 박제함과 동시에 하얀 표면을 통해 일상 위 모종의 서사를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하는 듯도 보인다. 작가는 여기에 다리를 더한다. 하지만, 상부의 덩어리에 심어놓은 다리는 전통적인 조각이 지닌 상징성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이를테면 상체에 비해 빈약한 다리는 이상적 비율과 동세를 통해 달성한 기존 조각의 기념비적 가치로부터 벗어나 독특한 자세를 지닌 유기체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비율이 어긋난 듯 힘겹게 지탱하고 선 균형감은 선(다리)에서 면(덩어리의 한 면)으로, 그리고 모종의 시공을 향해 나아가려는 (,혹은 구축하려는) 움직임으로까지 시선을 확장시킨다. 그의 또 다른 작업인 <라이브 러스트_오디세이 23001 (α) (β))>에는 조각가의 신체가 온전히 담겨있다. 본 작업에서 변상환은 형강 빔의 한 면에 방청페인트를 도포하여 평면 위로 찍어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재료가 가진 고유의 성질은 페인트의 색감을 통해 번안되고 , 물질의 부피와 질량, 깊이와 공간감은 작가의 몸짓과 반복된 공정의 시간으로 번역되어 기하학적 추상 패턴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그는 해당 작업을 동일한 형상에서 분리된 α와 β 한 쌍으로 구성함으로 하나의 흐름 안에서 형성된 이미지의 시간과 공간성을 물리적으로 연장/ 확장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물질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형식적 가능성을 통해 의미의 변이와 연쇄를 꾀하는 <조각의 사리>에서도 살필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전국광의 조각에서 기본적인 특성은 ‘형태적’인 것에 앞서 그 ‘구조성’에 있다. 이러한 구조는 각 단위들에 변주와 변용을 거듭 적용하며 쌓거나 겹치는 가운데 재료에 내재한 성질의 형식적 출몰로 가시화된다. 자연은 그의 작업은 모티프라 할 수 있으나, 그는 자연의 외양을 모방하지 않는다. 외려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를 견고한 형태로 구축해내는 것이 그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초창기 주요 개념인 ‘적(積)’에서 시작하여 조각의 기본 요소인 양감, 동세, 질감 등을 지닌 덩어리(mass)로서의 형식으로 수렴된다. 전반기 작업에 해당하는 <괴>는 이러한 작가 고유의 방법론, “동일한 규격의 물질이 임의의 조건에 의해 변이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여기서 주지해야 하는 사실은 그가 형상이 지닌 이미지보다는 덩어리 자체의 용적을 근간으로 한 물질 변형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후 <매스의 내면> 시기로 넘어오면서, 그의 관심은 채워진 공간과 비어진 공간, 사물의 안(구조)과 밖(형태)을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으로 향한다. 이를테면 <지속적 반응>에서 작가는 사각형의 점토 여러 장을 겹친 후 한 방향으로 힘을 가하여 사각에서 사각이 아닌 것으로 형태를 변형시키고, 외형의 찢어진 틈새로 내부를 드러나게 하는 식으로 미적 경험을 선사하는 형상에서 내부의 구조체, 즉 ‘매스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긴 파이프가 집적되어 구축된 형태, 또는 나무와 돌, 골판지를 찢는 퍼포먼스 역시 <매스의 내면>이라는 주제 아래 공간과 공간감, 중량과 중량감,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등을 동시에 노출함으로 허공간과 실공간의 문제를 제기한다.
작가들이 구축한 이미지에 접근하는 일련의 해석이나 기원을 살필 때, 전시는 두 개의 양극에 위치한 장르, 즉 입체 조각과 평면 사진을 두 축으로 하지만, 두 개의 항이 결코 서로 대척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같은 장르에 속한 두 작가는 서로 다른 태도에 기반하여 타 장르와 적극적으로 교차한다. (물론 때로는 매체/ 장르적 범주 내에서 서로 다시 맞물리길 반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기대고 쌓이는 과정을 통해 물질에 내재한 성질을 가시화시키는 전국광의 조각은 사진의 프로세스 자체를 의미의 중심축에 놓은 오연진의 사진과, 그리고 시간성을 내포한 채 프레임 바깥으로 시선을 이끄는 전명은의 사진은 조각가의 신체성을 온전히 담지한 채 조각에서 평면으로, 그리고 또 다른 평면을 파생하는 변상환의 작업(라이브 러스트_오디세이 23001 (α) (β))과 맞물린다. 그리고, 석고를 사용한 조각의 표백된 표면을 통해 모종의 서사를 덧댈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변상환의 작업은 전명은, 오연진의 작업과 일정 부분 교접하기도 한다. 반면,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기록함으로 성립하는 전명은의 사진은 오연진의 과정으로 수렴하는 사진 방법론과는 사뭇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결국 본 전시는 매체를 중심에 놓고 이미지가 위치하는 경계를 구분 짓거나, 하나의 키워드로 간단히 요약하여 의미의 층위를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가 구축된 내적 동기나 자율성, 아우라, 창조력 같은 내적 징후들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지닌 행위성(agency)이나 시적 자율성을 토대로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것을 상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미지는 일방향적 소비의 대상이 아닌, 사유를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플랫폼으로서 열리게 된다. 이미지는 발생의 기원과 출처에서부터 그것을 둘러싼 사회, 정치, 문화, 경제, 역사적 함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를 내재한 해석적 기호이다. 심지어 시장 논리 아래 소비되는 심미적 상(象)인 동시에 그 자체로 다시 자본의 논리를 과감하게 뒤트는 언어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사적인 것에서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되고, 거시와 미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해석은 풍부해진다. 나열된 이미지의 연쇄 속에서 소멸하고 확장하는 것조차 이미지의 한 단면일 수 있다. 그렇게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결론지어진 종착점이지만, 우리가 이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다양한 문맥에 다가서기 위한 경로가 열린다.
크레디트
참여 작가 : 변상환, 오연진, 전국광, 전명은
기획 / 글 : 김성우
디자인 : 강주성
공간조성 : 30pro
기술지원 : 장준호
사진 : 전명은